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일본군의 4차 공세 === 2월 27일, 일본이 영국 측에 정전교섭을 의뢰하여 다시 중일 정전교섭이 행해져 동시 철수를 합의하게 되었다. 2월 29일 뱃멀미에 시달리던 시라카와 사령관은 11사단 선견병단,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막료들을 이끌고 중순양함 다에다카를 타고 나타났다. 이들의 상륙을 돕기 위해 3월 1일 88사단이 수비하던 죽원돈, 양가교 일대가 공격을 받았다. 이후 11사단이 탑승한 일본군 대함대가 나타나다. 유하 지역에서는 장광나이의 오판 때문에 교도총대 소속 1개 중대가 주둔할 뿐이었고 이들은 순식간에 전멸했다. 오전 7시, 칠료구와 육병구에 일본군이 상륙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장즈중은 1개 여단을 보내 구원하려 했으나 이들을 수송할 자동차가 태부족이라 실패했다. 이로 인하여 천밍수, 장광나이, 차이팅카이 등 19로군 지도부는 중앙에 신속한 지원군 파병 및 만주로 진공하여 상하이에서의 압력을 분산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일본과 정면으로 전쟁을 벌이는 일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이를 거절했다. >"일본 군대는 모두 21개 사단으로 집결이 용이하고, 일본 항구로부터 중국으로의 군대 수송도 빠르다. 현대 일본군은 제해권과 제공권을 모두 장악하고 있다. 중국 군대의 집결과 수송은 일본 군대보다 느리며, 고사포대도 연습은 실시했으나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중국 군대가 몇차례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을 때 일본과 교섭하여 정전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일본 군대의 지원군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되면 그때는 조건이 훨씬 가혹할 것이다." 여기에 19로군 지휘부는 이미 유하 방면에 14사단까지 상륙한 상태라고 오판, 전투기, 장갑차, 전차로 중무장한 일본군을 물리칠 수 없다고 여겨 1일 밤에 철수했다. 이때 상하이로 수송되던 14사단이 이미 상륙해 있었다고 19로군이 오판한 데는 [[카와시마 요시코]]가 퍼뜨린 소문이란 주장이 있다. 철수한 19로군은 패배의 이유를 지원군을 충분히 보내지 않은 중앙에 돌리는 전문을 전국 각지에 보냈다. >"제19로군은 일본 군대에게 항전하여 한달이 넘게 고전하였다. 일본군은 무기가 우수하고, 수송이 민첩하다. 제19로군은 국민의 원조에 의기하고 병사들이 충용하여 육박전으로 사상자가 서로 겹쳐 쓰러지는 과정에서도 일본 군대의 선두 부대를 여러 차례 좌절시킬 수 있었다. 일본 군대는 2개의 사단이 더 증병되어 왔는데, 중국 군대는 제5군 이후 지원군이 오지 않았다. 2월 11일 중국 군대는 사상자가 심각하여 정면 전선에 집중하였고, 일본 군대의 여러 사단은 유하 방면으로 상륙하였다. 중국 군대는 지원병이 없어서 측면 후방이 위험에 처하였다. 이로 인해 부득이하게 3월 1일 밤에 전군이 제2 방위선으로 후퇴하여 저항하고 있다. 제19로군은 탄약이 다하고 병졸 한 사람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일본 군대와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문제는 5군은 19로군의 철수를 2일 오후 2시나 되어서야 알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에 혼자서 맞서 싸우며 격심한 피해를 입던 5군은 뒤늦게야 철수하기 시작하여 태창-안정진 선으로 후퇴했다. 이로서 1차 상하이 사변은 일단락되었다. 장개석 총통전을 지은 동현광은 다음과 같이 쓰면서 일방적으로 철수한 19로군을 비판하고 있다. >"이 사건은 5주일 동안에 걸친 저항에 하나의 정기를 가져왔다. 장나이내와 차이팅카이는 중앙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또 제5군에 아무런 통고도 하지 않은채 제19로군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 그러는 동안에 장제스는 제19로군이 그의 충고에 따라 유하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믿고, 형세 만회를 위해 증원군을 파견했다. 증원군의 선봉은 정해진 날에 상하이 부근에 도착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장광나이와 차이팅카이가 전투포기 명령을 내린지 이틀 뒤였다." 19로군이 철수하자 일본은 켈리에게 다시 중국 군대의 선제적 철수를 요구하면서 27일에 정해진 동시 철수 조건은 깨지게 되었다. 하지만 외교부장 [[뤄원간]]과 [[궈타이치]] 모두 이 조건을 거부했다. 뤄원간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영국 군함에서 2월 28일 비공식적인 회담을 소집하여 5항의 기본조건을 정하였다. 중국 대표는 다음날 이를 접수하였으나, 일본은 대답이 없었으며 대규모의 군대로 중국 군대를 다시 공격하였다. 정전 협정이 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이 성의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다시 조정회담에 나갈 것이지만, 영토를 할양하거나 국권에 굴욕적인 어떠한 조건도 거절한다." 또한 국제연맹 대표 [[옌후이칭]]은 일본을 맹렬히 비난했다. >"영국 군함에서 상의한 정전조건은 중일 양국 군대가 동시에 즉시 철수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바로 이 조건을 접수했으나, 일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날 일본군대가 갑자기 중국군 제19로군을 공격하여 제2방위선으로 퇴각하도록 압박하였다. 이후 일본은 3월 2일 밤 영국 켈리 해군 사령관에게 다시 정전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투항을 의미하는 것과 같았다. 중국은 만주사변 이래 상하이 사변까지 중일 충돌 사건을 국제연맹에 위탁하여 해결하려고 모색하였고, 국제연맹 이사회의 모든 평화의 방법을 접수하고 있지만, 일본은 국제연맹의 여러 결의안, 맹약, 부전조약, 구국공약을 모두 경시하고 있다. 일본 군대 10여만명이 상하이로 지원되어 와 있고, 일본 전투기의 폭격으로 쑤저우, 항저우의 시민들 7천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로써 국제연맹의 결의안, 맹약, 부전조약, 구국공약의 모든 규정은 공문에 불과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